집은 거주 공간이기 전에 기록 매체다. 말로 쓰지 않아도 서랍과 냉장고, 벽과 선반은 하루의 잔광을 받아 적는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놓였는가, 무엇이 오래 남고 무엇이 자꾸 사라지는가가 곧 삶의 목차를 만든다. 나는 오래전부터 집을 하나의 아카이브로 생각해 왔다. 보관이 아니라 편집, 축적이 아니라 배열, 저장이 아니라 서사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사서이자 전시 기획자이며, 동시에 작가라는 사실을. 집 안의 작은 이동이 한 페이지의 개정판을 만들어 내고, 손이 먼저 기억하는 길이 가족의 기호를 바꾸어 놓는다. 오늘은 집을 지도처럼 펼쳐 물건과 기억의 좌표를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랍, 냉장고, 벽과 현관 선반. 이 세 곳만 찬찬히 읽어도 우리의 지난 계절이 충분히 들릴거에요.
서랍의 인덱스 손이 먼저 아는 문장들
서랍을 열 때마다 나는 사전의 머리말을 열람하는 기분이 든다. 겉보기에는 작은 개체들의 무더기지만, 손끝은 이미 분류표를 알고 있다. 길이가 다른 고무줄과 납작하게 구부러진 종이클립, 빨간색과 파란색 볼펜, 공연 티켓의 절취선, 오래된 배터리 두 개, 쓰다 만 메모지 뭉치. 이 자잘한 것들이 함께 있을 이유는 단순하다. 급할 때 손이 먼저 찾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급함의 가족이 한데 모여 서랍이라는 읍에 산다. 그래서 서랍은 우리 집의 긴급 인덱스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그러나 사라지면 집 전체가 느려지는 목록.
한 번은 서랍을 대대적으로 정리한 적이 있었다. 나름의 규칙을 세워 칸막이를 만들고 라벨을 붙였다. 고무줄은 고무줄끼리, 배터리는 배터리끼리. 깔끔한 장면이 완성되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손은 다시 예전의 혼합을 그리워했다. 칸막이를 넘나드는 것은 성격이 아니라 상황이라는 사실을, 서랍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라벨을 지우고 칸막이 하나를 비워 두었다. 비워 둔 칸막이에는 어느 날 분실물을 찾는 마음들이 모였다. 새 키 하나, 돌아오지 않은 우편물 조회 번호, 갑자기 필요해진 여권 사진. 서랍은 도서관의 폐가서가 아니라 돌아다니는 잡지에 가까웠다. 목차가 당일의 사건에 따라 바뀌고, 다음 호가 나오면 곧바로 낡아지는 잡지.
그날 이후로 내 서랍 정리는 목록이 아니라 동선이 되었다. 자주 쓰는 왼쪽 앞칸에 약봉지와 거즈를, 오른쪽 뒤칸에는 설명서를 모았다. 설명서는 시간을 연결한다. 낯선 기계를 집에 들일 때 붙는 얇은 책자들은 집 안에 새 언어가 생겼다는 증거다. 설명서는 번역의 역사이고, 서랍은 그 번역을 보관하는 소규모 국립도서관이다. 정리하다 보면, 어느 기기는 이미 집을 떠났는데 설명서만 남아 있는 경우를 발견한다. 그 순간, 서랍이 물어 온다. 떠난 것의 흔적을 계속 보관할 것인가. 물건의 부재를 기억으로 유지할 것인가. 나는 설명서를 버리는 대신 가장 뒤쪽에 눕혀 둔다. 맨 뒤칸은 끝이 아니라 뒤표지다. 거기에 누운 얇은 책자는 집을 떠난 것들의 결말을 조용히 맡는다.
서랍은 촉각의 지도다. 눈으로 보기 전에 손이 먼저 길을 찾는다. 손은 어둠 속에서도 전선과 종이를 구분하고, 둥근 것을 먼저 더듬고 납작한 것을 나중에 찾는다. 손의 기억이 집의 규칙을 만든다. 가족이 서랍을 여는 방식은 각자의 인덱스가 만나는 방법이고, 그 만남은 자잘하지만 자주 일어난다. 같은 서랍 앞에서 누군가는 고무줄을, 다른 누군가는 약봉지를 먼저 꺼낸다. 같은 장소의 다른 목차가 겹치며 작은 오해와 작은 협력이 반복된다. 이 교차가 쌓여 집의 문장들이 길어진다.
냉장고의 시간표 식탁에서 시작된 연대기
냉장고는 시계다. 문을 열면 지난주가 보이고, 박스를 열면 어제가 들린다. 유리병 속 장아찌는 작년과 하반기라는 눈금을 품었고, 위칸의 얼음은 아무 날짜도 붙이지 않은 오늘의 예비군이다. 그 사이사이에는 작은 지각과 빨리 닳아버린 결심의 흔적이 끼어 있다. 반쯤 먹다 남은 요거트, 어제의 국물, 주말의 파스타 소스, 끝이 말라버린 허브. 냉장고는 유통기한의 법률과 입맛의 관습이 공존하는 법정이다. 나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집안의 시간표를 펼친다. 오늘의 저녁이 무엇인지보다 지난 일주일의 리듬이 어땠는지를 먼저 읽는다.
냉장고 앞면에는 자석과 메모가 붙어 있다. 약속의 조각들이 자석의 힘으로 겨우 붙어 있는 풍경. 그 메모들은 가족의 정책 문서다. 누구의 약 복용 시간, 어린이의 급식 체험 주간 안내, 재활용 배출 요일, 다음 달 등록금 납부일. 자석 하나가 떨어지면 어떤 일은 실제로 빠진다. 그래서 나는 자석을 사진처럼 고정시키지 않고 가끔 위치를 바꾸어 민감도를 확인한다. 자석이 떨어지는 위치는 자주 잊히는 항목이고, 자석이 잘 붙는 위치는 집안의 시야가 자동으로 향하는 곳이다. 냉장고의 문은 암묵의 우선순위를 보여 준다. 그 문을 여닫는 횟수가 하루의 우려와 반가움을 측정한다.
냉장고 안의 배치는 내면의 영양 그래프이기도 하다. 채소칸이 바쁘면 내가 건강을 다독이는 시기고, 음료칸이 붐비면 야근이 잦았다는 뜻이다. 소스 칸에 늘 있는 두 병은 취향의 고향이고, 새로 들어온 병은 작은 이주의 기록이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들인 페이스트는 두 번 쓰고 잊히기 쉽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꺼내어 전혀 다른 요리를 만든다. 그때 나는 알게 된다. 취향은 직선이 아니라 고리여서, 냉장고의 맨 끝에서 맨 앞까지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한 해에 한두 번, 냉장고의 대청소를 한다. 그날은 살림의 고고학이다. 가장 뒤에 있던 병과 통을 하나씩 꺼내 다시 봄의 햇살에 놓는다. 라벨의 날짜는 그 시기의 나를 소환한다. 이사 직후에 샀던 젤리, 가족이 아팠던 겨울의 생강청, 한때 집에서 빵을 굽겠다며 사들인 버터. 버려지는 것들은 후회와 미완의 목록을 데리고 나가지만, 남는 것들은 다음 장면의 재료가 된다. 버림과 보존의 균형을 잡는 이 의식은 집의 시간표를 재설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냉장고의 가장 앞줄을 비워 두면, 다음 주의 여지를 남기는 마음이 생긴다. 비워 둔 칸은 계획의 공백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여백이다.
냉장고는 또한 식탁으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문을 닫고 식탁에 앉으면, 방금의 선택이 접시 위에서 문단이 된다. 무엇을 덜어 서로에게 건넬지, 어느 정도 간격으로 숟가락을 두드릴지, 마지막 한 점을 남길지 말지. 식탁은 냉장고의 기록을 발음하는 곳이다. 그 발음에 따라 하루의 정서가 정리된다. 내가 사랑하는 저녁은 의외로 거창하지 않다. 냉장고 속 남은 것들로 조용히 차린 식사, 그 앞에서 나눠 앉은 두 사람의 흐린 하루가 천천히 맑아지는 시간. 그때 냉장고는 시간을 보관하는 기계가 아니라, 오늘을 회복시키는 사서처럼 보인다. 장을 넘겨 다음 페이지로 이끄는.
벽과 현관 선반의 전시 대화하는 액자와 모여든 이별들
집의 벽은 전시장이고, 우리는 매일 그 전시를 지나쳐 출근하고 귀가한다. 못 하나의 위치가 문장의 쉼표를 결정하고, 액자의 간격이 호흡의 길이를 정한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벽을 둘러보았다. 소파 뒤의 비어 있는 면, 책장 위의 낮은 벽,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좁은 길. 어디에 어떤 이야기를 걸어야 이 집이 우리를 닮을지. 사진과 그림, 엽서와 손글씨가 각자의 틀을 가지고 나타났다. 무작위로 걸어 두면 벽은 잡지처럼 산만해지고, 지나치게 균일하게 걸어 두면 벽은 관공서처럼 엄숙해진다. 그래서 나는 대화하듯 배열했다. 가족 사진 옆에 낯선 도시의 흑백 사진을 두고, 그 옆에는 아이가 그린 강아지를 붙였다. 세 이미지가 서로를 비춘다. 여기서의 웃음이 저기에서의 그리움을 데려오고, 종이의 삐뚤빼뚤한 선이 자꾸 현실의 각을 둥글게 만든다.
벽의 전시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그림 한 점의 위치가 어김없이 흔들리고, 계절이 바뀌면 색의 무게를 바꾼다. 특히 여름 끝자락, 바람이 바뀌기 시작하는 밤에는 포스터 한 장의 자리를 옮긴다. 자리를 옮긴 포스터는 새 작품이 된다. 같은 이미지라도 위치가 바뀌면 맥락이 달라지고, 그 맥락이 감정의 온도를 바꾼다. 그래서 못이 많아진다. 못은 상처가 아니라 구두점이다. 삶의 단락이 끝날 때 찍는 마침표가 벽에는 작은 구멍으로 남는다. 그 구멍을 탓하지 않는다. 구멍들은 이 집의 문장 부호다. 줄 바꿈을 알리고, 쉼을 허락하고, 이어 말하도록 재촉하는 부호.
현관 선반은 다른 종류의 전시실이다. 여기는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이 잠시 서성이는 곳.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별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다.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인데, 많은 작별 인사는 현관에서 끝난다. 택배를 반납하러 나갈 때 선반에 올려 둔 물건처럼, 관계의 반납에도 잠깐의 대기가 있다. 최근 어느 밤, 선반 위에는 작은 종이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헤어진 뒤에야 돌려받은 책 한 권과, 표지 사이에 접어 넣은 연필, 그리고 짧은 손글씨. 이별이 덩어리째 놓인 장면. 나는 봉투를 바로 책장으로 옮기지 못했다. 며칠 동안 선반 위에 두었다. 아침마다 신발을 신으며 그 봉투를 지나쳤고, 밤마다 열쇠를 올려놓으며 다시 마주쳤다. 집 안쪽으로 들이지 않은 채 출구 근처에 둠으로써, 나는 아직 그 이별을 집 내부의 기록으로 편입시키지 않은 셈이었다. 현관 선반은 그런 보류의 장소다. 이별을 서재의 칸으로 편입시키기 전, 마음이 퇴색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곳.
선반에는 또 다른 이별들이 겹쳐 있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우산, 몇 달째 주인을 찾지 못한 장갑 한 짝, 잃어버렸던 귀걸이의 외로운 짝. 이들은 모두 작은 응급실처럼 현관에 눕혀 있다가 어느 날 제자리를 찾거나, 다른 누군가에게로 건네진다. 그 과정에서 선반은 마을 공지판처럼 된다. 가족이 서로에게 메모를 남기고, 이웃이 과일을 놓고 가며, 친구가 빵을 걸어 간다. 현관 선반에서 우리는 수시로 작별하고 수시로 재회한다. 매일의 인사와 매일의 포옹이 그 위를 통과한다. 그래서 현관 선반의 먼지는 쉽게 쌓이지 않는다. 손길이 잦은 곳은 먼지가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손길이 많다는 것은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이 집이 아직 현재형이라는 뜻이다.
어느 날 나는 선반 위의 봉투를 책장으로 옮겼다. 책은 제 동네로 돌아갔고, 연필은 필통으로 들어갔다. 손글씨는 누런 종이 상자에 겹겹이 보관해 둔 편지 묶음으로 들어가 목차를 새로 얻었다. 선반은 다시 가벼워졌다. 이게 집의 문법이다. 잠시 머물게 하고, 충분히 보고, 그다음에야 배치하는 절차. 이렇게 우리는 물건을 옮기며 기억을 편집하고, 집은 그 편집을 무언의 질서로 받아 적는다.
벽에는 때로 상실을 위한 작은 제단이 필요하다. 사진 한 장을 빼고 그 자리에 흰 종이를 붙이는 식의 빈 자리 기획. 빈 자리만큼 기억이 또렷해지는 경우가 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웃음보다 그가 없을 때 방에 생기는 공기가 더 정확하게 그를 가리키는 순간. 벽의 빈칸은 그런 순간을 허용한다. 전시의 과욕을 줄이고 공간을 비워 두면, 집은 갑자기 조용한 도서관이 된다. 아무것도 걸지 않은 벽이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줄 때가 있다. 빈칸은 망각의 예행연습이 아니라 존중의 방식이다. 붙잡지 않고 보관하는 기술. 벽은 그 기술을 가르친다.
집을 아카이브로 읽는 일의 좋은 점은, 우리가 날마다 작은 사서가 된다는 사실이다.
서랍에서 분류를 배우고, 냉장고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며, 벽과 선반에서 전시의 기술을 익힌다. 특별한 장비도 인증 절차도 없다. 다만 물건을 한 번 더 쓰다듬고, 자리를 한 뼘만 옮기고, 제때 보류하고, 때맞춰 버리는 선택. 그 선택들이 쌓여 집은 조금씩 다른 목차를 얻는다. 그 목차가 곧 우리의 다음 계절을 예고한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나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때의 나를 사진이 아니라 배치로 기억할 것이다. 어느 서랍의 뒤칸에 눕혀 둔 설명서, 냉장고 앞면에서 자주 떨어지던 자석, 현관 선반에서 오래 버티던 종이봉투. 그 좌표들이 지도를 만들고, 지도는 돌아가는 길을 알려 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서랍을 살짝 정리하고, 냉장고 문을 닦고, 벽의 못 하나를 옮긴다. 집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기록 중이고, 나는 그 기록의 문장을 한 줄 더 고치는 중이다.